2009년 06월 24일
카자르 사전, 풍장의 교실, 기타 책 잡상
밀어내기;
레안드로스와 헤로의 이야기와 관련 있다는 것 외에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바람의 안쪽이 나오자마자 냉큼 주문했던 건 순전히 귀동냥만 했던 카자르 사전의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. 정작 그렇게 손에 들어온 책은 번역체가 너무 거슬려서 정을 붙이지 못했지만; 올여름이 되자마자 동생을 들들 볶아대서 드디어 카자르 사전을 읽었다.
내가 카자르 족에 대해 아는 건 비잔티움 제국 초기 황후 둘이 카자르 공주였었다는 것뿐. 세력을 떨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카자르 족의 역사를 유대교, 기독교, 이슬람교의 세 시선에서 바라본 사전 소설, 이라고 하면 굉장히 간단하지만, 훨씬 더 깊었고, 읽는 내내 구름에 쌓여 환상을 건너는 느낌이 들었다. 9세기 전후의 종교 논란, 17세기 후반의 전쟁, 1982년의 살인 사건. 세 군데의 다른 시간과 장소. 동일인이라고도, 전혀 다른 이라고도 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. 인물들이 그렇게까지 개성 있고 창조적인지는 잘 모르겠다. 환상적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 같은데.
하지만 과거와 미래의 낱실과 씨실이 얽혀 짜낸 이 태피스트리는 무섭도록 매혹적이다. 어느 리뷰에선 퍼즐 맞추기라고 하던데, 정말 조각을 맞춰나가는 게 무척 즐거웠기 때문에, 남자판을 먼저 읽고 나서, 단 한 부분을 제외하곤 내용이 똑같은 여자판을 읽는 동안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. 오히려 이게 그 얘기였구나, 그제야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-_- 정말 즐거웠다. ...나야 원래 추리 소설 추리 안 하고 읽는 사람이니까.
언어덕;이어선지 아테 공주와 카자르어 부분이 이상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;
굉장히 즐거웠지만, 작년 여름 전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걸. 작가는 굉장히 능숙했고 누가 시인 아니랄까 봐 책도, 언어도 시적이어서 굉장히 독특했지만, 이런 타입(?)에는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려서 살짝 아쉬웠다. 환상 문학이어선지 보르헤스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고독과 매지컬 리얼리즘과 굉장히 닮은 느낌. 하지만 동유럽 분위기가 팍팍 나는 게 차이일까.
곁에 두고 몇 번이고 읽고 싶은 책. 바람의 안쪽도 나왔는데 재판은 안되려나...
물론 나도 여자판 파. 무아뮈아 박사와 슐츠 박사의 엄지손가락이 스치며 예언적 접촉이 이루어진 그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옆을 돌아봤다. 이 부분을 쓸 때 파비치는 대체 어떤 걸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. 아직 내 우주는 열리지 않았고, 미래와 과거도 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상상도 안 가지만, 재판이 되든, 헌책방에서 구하든, 영역을 사든, 여하튼 언제, 어떻게가 될지 모르겠지만 "내" 카자르 사전을 다시 손에 쥐었을 땐 내 우주가 열리면 좋겠다. 타이핑하는 내 손가락이 다 오글거릴 정도로 유치하고 식상하긴 한데; 진심으로.
2. 풍장의 교실
내가 굉장히 신뢰하는 분이 굉장히 호평을 내리셔서 마찬가지로 냉큼 산 책. 수록된 단편 셋 (풍장의 교실, 나비의 전족, 제시의 등뼈) 다 일종의 여자 성장 소설인데, 동생도 나도 첫 번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. 가장 따뜻한 건 제시의 등뼈였지만. 나비의 전족은 제목은 가장 마음에 들지만 임팩트는 가장 약했다. 앞의 두 단편은 하나같이 쿨하고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영악하고 삐딱한데다 중2병() 기미까지 살짝 엿보였었는데 마지막이 예상 외로 너무; 따뜻해서 깜짝 놀랐다. 하지만 어디까지나 따뜻하지, 달달하거나 감상적이지 않아서 더 좋았음.
정갈하고 섬세하면서도 굉장히 날카로웠다. 식상한 표현이지만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; 내가 접한 일본 소설 (플러스 영화랑 드라마) 상당수는 섬세하지만 깊고 강렬한 맛이 아쉬웠는데, 풍장의 교실은 섬세하면서도 탄탄해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. 거기다 단편 셋 다, 어디선가 많이 본 얘기들을 이렇게 풍부하게 뽑아낸 건 작가의 능력이겠지.
고등학교 때 한 번 쯤 읽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.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다시 읽어보고 싶다.
3. 기타 책 잡상
1) 돌아오자마자 처음 이 주 정도; 십이국기만 붙잡고 줄창 읽어댔고, 재판된 마성의 아이를 다시 손에 잡았다. 몇 년 전에 읽었을 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저 십이국기의 연장선...은 아니고, 타이키의 이야기니까, 하는 의무감으로 끝냈는데 다시 읽어보니 머리가 다 멍하다. 십이국기도, 다시 읽어보니 쇼류는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무르고,내가 이 부류에 면역이 된 건가; 요코님은 내 가슴이 벅차올라 주상을 절로 외치게 하신다. 내 최초이자 최고의 여왕님은 레 마누아지만 나카지마 요코가 무려 동급에 들어오셨다. 공왕이 안 들어오신 건 분량이 부족해서. 비서의 새. 주상 만세. 이제 뒷권 부르짖을 힘도 없고, 그냥 경왕께 경배를. ...난 경왕님은 전.혀. 걱정 안 하고, 쇼류도 안을 멸망시킬 왕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 걱정 안 하지만 (응?) 주상, 대국 얘기만 제발 어떻게 좀ㅠㅠ.
십이국기를 놓으니 이제 얼음과 불의 노래만 줄창. 응. 취향 너무 뻔해. 드래곤의 춤은 과연 올해 나올지.
...내가 이제 와서 십이국기를 붙들고 있는 게 현실도피인 건 아니겠지. 아닐거야.
2) 러시아 문학이 너무 좋아요. 이 사람들 진짜 정열적이다; 막장도 이 정도 고품격이면 세계 명작인 법. 아니, 막장 아닌 세계 명작 찾는 게 더 빠르려나. 한국 문학도 열심히 읽는 중.
리스트는 점점 길어지는데, 영어를 읽을 수 있으니 영미문학은 번역본에 손이 안 가는 예상 외 부작용이 일어났다. 그래도 로드 번역본은 한 번 읽어봐야 할 듯. 전에 읽을 때 내용과 문단에 발렸지 문장에 발리진 않았는데, 모두 다 예쁜 말들은 첫 문장에 직격당해서 그 후 처음 몇 장 가슴이 두근거려서 제대로 읽지 못하고 한참을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. 나 문장 되게 밝히는데 왜 그땐 느끼지 못했을까.
# by | 2009/06/24 11:55 | 책 | 트랙백 | 덧글(2)








